[일지] 게임 제작의 발자국

[개인] 2025 1분기 결산: 노릇노릇한 토스트아웃인가?

련잉엥용 2025. 5. 5. 22:50

0. 형식 없는 근황 토크

 

또다시 오랜만입니다.

지난 글도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다음 달, 2월에 돌아온대놓고 벌써 마지막 글로부터 세 달 남짓 지났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일이 지났고, 새로운 신분에 적응하는 시간이 되었다. 생각보다 바쁘고 생각보다 무료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내 삶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쌓인 생각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아주 길고 긴 일기장이 될 거란 이야기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재미 없는 이야기란 말이다.

별 일은 없었다. 오히려 별 일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난 일종의 번아웃이라면 번아웃일 무언가를 경험하며 적응하려 애썼다.

 

 

1. 직장인은 처음이라

 

따지고 보면 그렇다, 나는 내가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인생의 어떠한 페이즈를 지나는 중이다.

내가 열 살 남짓 되었을 때부터 난 언제나 무언가의 큰 목표를 마주했다. 매일매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국제중을 가겠다는 목표, 외고를 가겠다는 목표, SKY에 가겠다는 목표, 좋은 곳에 취업하겠다는 목표... 모든 한국인이라면 그렇긴 할 거다.

그리고 항상 내가 노린 목표의 결과는 1순위보다는 2순위에 안착했다. 국제중을 떨어지고 다른 중학교에, 외고를 떨어지고 다른 고등학교에, SKY에 떨어지고 다른 K대에, 지망하던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내게 1순위였던 목표들보다 2순위에 안착하게 된 자리가 더욱 나에게 도움이 되고, 잘 맞았다.

국제중이나 외고를 갔다면 나는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구겨지고 말 성격이었고, 아마도 많이 망가졌을 거다. 또 SKY의 커리큘럼은 내가 지금 다니는 직종에 아주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그 안에서의 배움이야 뜻 깊고 의미 있었겠지만,  그 때 내가 지망했던 학과는 지금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 코로나를 거치며 내 인생의 커리어를 설정하고 난 뒤, 내 학교에서 내 학과로 배울 수 있던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더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지망했던 1순위 회사도 나중에 알고보니 이런저런 악명이 높기로 소문난 프로젝트였고, 지금은 안 가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명예와 타이틀의 차원에서는 모두 1순위가 멋있지... 만, 항상 조상님인지 신인지 초자연적인 힘인지 뭔지 모를 무언가는 내게 그런 명예와 타이틀보다는 나에게 더 딱 맞는 길을 설정해주는 것 같다. 언제나 후회가 없는 길로.

그런 고로 나는 항상 내가 설정한 목표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운 좋게도 항상 좋은 결과를 내었다고 자부한다.

 

그런 나는 지금 당장, 감사하게도 더이상은 큰 목표가 없다.

물론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위해 결혼을 준비한다거나 하는 것도 하나의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당장 임박한 목표는 아니다. 당장 내가 준비를 마친대서 되는 일도 아니고. 그건 때가 되면 잘 할 거란 확신이 든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고, 건강하기도 건강하다.

당장 성장에 대한 갈망이 없어지니 갑자기 뭘 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직장에 적응하는 건 조금 어렵긴 했다. 저녁형 인간인 내게 이제 앞으로 이게 내 일상이라니... 싶은 생각에 갑자기 주변에 놀러다니는 학생 친구들을 보며 조금 슬퍼지기도 했고,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쳐서 퇴근 후 운동을 쉬기도 했다. 무언가 다른 생산적인 활동을 하려고도 고민해봤는데 약한 번아웃이 찾아와서 금방 스트레스를 받길래 쉬기로 했다.

가시적인 목표가 없을 때 뼈 빠지게 노력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런데 뼈 빠지게 노력할 게 없을 때에 무얼 할지 찾아내야 하는 건 또 처음이다. 학교 다닐 땐 남는 시간에 마냥 놀면 됐는데, 지금은 돈이 많아도 시간과 체력이 모두 애매하게 부족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놀기엔 또 아까운 느낌이다. 놀기엔 아직 할 일을 마저 다 하지 않은 기분. 모르겠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2. 멘탈 노릇노릇

 

당장에 나를 움직이게 하기 위한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더 좋은 직장도 고민을 해봤다.

사실 지금 내 직장은 꿈만 같다. 안정적으로 라이브 서비스 중인 게임에서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고, 사람들도 정말 친절하고 다정한데 MBTI T인 사람들이라 편안하고, 회사도 꽤 이름이 있고 페이나 복지도 꿀통이라며 소문이 났고, 회사 문화도 정말 좋다. 다른 직장인과 대화를 해봤을 때도 확실히 나는 정말 좌충우돌 게임 업계에서 천운인 자리에 온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냥 단 한 가지, 내가 원래 원하던 퀘스트/시나리오 쪽 포지션은 아니었을 뿐... 지금 일도 재밌기야 하지만 성향에 맞는 건 아닌 듯 했다. 창작을 하기보다는 정답이 있는 일을 하는 직무다. (안다, 퀘스트/시나리오도 창작은 아니다. 그래도 비교하자면 조금 더 그렇다.) 아무래도 하루에 8시간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다보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관 직종이라 커리어야 인정은 되겠지만 포지션을 바꾸려면 빨리 바꾸는 게 나으려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연휴 전까지는 일단 적응하기 바쁘게 고민을 하다보니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연휴에 오랜만에 그걸 모두 충분히 생각하고 고찰하고 처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이 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좋은 회사에서 이런 생각까지 다다르게 된 계기가 결국은 목표를 세우고 움직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사를 간대도 그 때는 또다른 외부 요인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걸 앎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지간히 오버띵킹을 했다는 거다. 뒤늦게야 그걸 깨달았다.

아... 그냥 목표를 찾지 못해 불행하다는 건 반대로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지 못해서 행복을 찾지 못한 거구나... 나 복에 겨운 거구나... 나도 내 맘을 몰랐어... 하는 느낌의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뭐 당연하기야 하다. 생전 처음 회사를 다니다보니 이래저래 긴장도 많이 하면서 정신이 많이 피로해졌다. 이전만큼 계획을 세우고 생각을 하고 날 돌이켜봤다면 괜찮았을텐데 생각을 미루게 되곤 했다.

결국 이런 안정적인 일상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건데 막상 안정적인 일상을 가지니 뭘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것.

다 됐고 긴장 많이 해서 피곤하다보니 멘탈도 같이 피로해진 거였다.

나됴 내갸 피곤한쥴 몰랏서...

 

 

 

3. 결론은 행복할 거다

 

앞으로 이런 걱정 없이 행복할 날이 또 언제 어떻게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데, 이 행복한 날을 목표가 없다는 불안으로 또다시 걱정으로 채우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오버띵킹을 하는 사람이래도 이전엔 걱정이 있는데도 행복했는데, 걱정이 없을 때에 행복하지 못하고 불안한 건 억울하잖아. 정정한다. 지금도 행복하긴 하지만, 계속 형체 없는 불안에 뒤를 힐긋힐긋 돌아보는 일만 없으면 좋을 것 같다.

노릇노릇한 미디움웰던 번아웃 상태인 건 맞는 것 같다. 웰던까지는 아니었던 듯. 취업 전까지 정말 노력도 고민도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노력해서 다시 추진력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쩔수쩔수.

노릇노릇

더 나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은 게임을 플레이해야 한다든가, 엔진 공부를 해야 한다든가,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든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제 공부를 해야한다든가, 체력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하기엔 내가 너무 일상을 열심히 살고 있다. 그 이전에도 열심히 살았다. 정말 열심히. 포상으로 당분간은 좀 걱정 없이 쉴 거다.

어쨌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난 최선을 다 할 거고, 좋은 결과를 낼 건 알고 있다.

 

추진력을 얻기 전에 몸을 웅크리는 시간 동안 불안하기보다 행복하기 위해 지금부터는 가능한 걱정 불안 없이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려 한다.

요즘은 뜨개질이 그렇게 재밌고, 새롭게 던전밥도 봤고, 모던 패밀리도 보고 있으며, 리버스1999도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다. 오랜만에 그림도 그려보고 싶고, 글도 써보고 싶다. 그냥 밖에 나가서 이것저것 하며 놀고 싶기도 하다. 그 끝이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내 성향상 올해가 가기 전에는, 아마 8~9월 전에는 이 여유를 깨부수고 또 다른 목표가 나타날 것도 같다. 그 전까지는 좀 여유롭게 살아야지.

 

...라는 선언을 마지막으로, 블로그에도 글을 좀 다시 써보려고 한다.

사실 이것도 저번처럼 빈말이 될 수는 있다. 강제로 써야하는 의무도 없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근육을 기르려고 만든 목적의 블로그니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리해보면서 이전처럼 서브컬쳐 게임을 분석해보던 건 재밌었기 때문에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짬날 때 한번씩 써봐야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서브컬쳐 남덕후가 좋아하는 싫어하지 않는 남캐상"이다.

아무튼, 행복을 되찾고 언젠가 돌아오겠다. 아디오스.

 

PS.
위 내용을 적다보니 생각난다.
이번 리버스 중섭 신 챕터 이름은 존 밀턴의 복낙원 Paradise Regained더라. 진짜 질투났다. 너무 부러웠다. 영문학을 소재로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이렇게 환상적인 연출과 미감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너무너무 부러웠다.  나도 이런 거 하고 싶어. 나도 이런 거 잘 만들어.  나도 함께 하고 싶다. 나도 이런 거 잘하는데...
진짜로 중국어를 다시 배울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낙원처럼 보이는 프로젝트는 상상 속 낙원으로 남겨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블루포치 사는 이 낭만으로 나도 계속 질투할 수 있게 좋은 콘텐츠 많이 내주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