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매주 컨셉 하나

#03 가끔, 인생에서 질 때도 있는 거다.

련잉엥용 2024. 3. 3. 02:48
    • 장르: 단편소설. 디스토피아. 판타지.
    • 시놉시스: 어머니를 잃고 우울에 빠진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하던 주인공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한다. 하지만 그 또한 소중한 이를 잃은 후에야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 기획 의도: 손 가는대로 써보는 글의 연습. 이전에 썼던 러프를 다듬어냈지만, 대부분이 새롭게 창작한 부분이다.

 


아버지는 늘 그 말 뿐이었다.

작은 화톳불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집안에 검게 뿌리내린 우울과도 같았다. 저는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조차 나지 않아 그 그림자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너무나도 속절없이 그 손에 그러쥐이고 말았다. 그는 그 손길을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잠식은 순식간이었고, 집에는 불씨 타닥이는 소리와 바람 새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너무도 어렸던 아이가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으면 긴 침묵이 이어지곤 했다. 몇 차례 침묵이 거듭되고, 그 침묵에 겁이 더러 난 아이가 다시금 울음 섞인 질문을 하고 나서야 돌아온 대답이 저것이었다. 그 무게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웠기에 짧은 대담은 거기에서 그치곤 했다. 눈물을 참고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는 것은 그 아이가 아비에게 받은 첫 생존 수업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가 화톳불 앞을 지키는 것이 어느덧 일상으로 자리잡을 즈음 아이는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깊게 뿌리내린 아버지의 우울을 외면하기로 했다.

고목처럼 커다랗던 그의 등의 더이상 위압감을 풍기지 않았기에, 거대하게 느껴지던 그의 그림자가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그가 패배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아이는 그를 한심히 여겼다.

 

 

승전보가 울려퍼졌다.

코가 저릴만큼 강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마물의 거대한 머리는 열 사람이 들어도 겨우 들까 말까 했다. 제 것인지, 죽은 전우의 것인지, 마물의 것인지 모를 피칠갑을 하고 나타난 행렬을 모두가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이번 것은 이빨이 어마어마했대, 하는 수군거림. 실제로도 허옇게 드러난, 장정 하나 정도 크기의 이빨 사이엔 누군가의 옷가죽이 보란듯이 걸려있었다. 아마 살점 조각도 같이 걸려있었으리라.

행렬의 앞은 언제나 그렇듯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검붉은 사내였다. 하얗게 빛나는 것이라곤 그의 번득이는 눈 뿐. 그는 피 때문인지, 원체 그런 것인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행렬을 이끌었다. 하늘은 그의 붉은 머리칼에서부터 그가 마주할 피, 엄청난 양의 피를 예고했다. 어느덧 여인이 된 아이는 인파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 말은 없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었다. 여인은 오래도록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사흘 밤낮 동안 천막엔 환자가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항상 마지막 순서를 고집했다. 자신은 어차피 크게 다치지 않았으므로 다른 이들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며, 그것이 족장 될 자의 도리라며 말하곤 했지만 그건 그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에도 나오는 소리였다. 그러니 늦은 밤에야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올 때에 여인의 입에서 먼저 나오는 것은 잔소리일 수밖에. 투박하게 족장의 도리를 다시 읊어대는 그의 붕대를 필요 이상으로 세게 동여맨 후에야 그는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나름대로 이 시간이 좋았다. 그와 대담을 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인간적인 호감에서 비롯함 또한 있었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의 오만에서 비롯되었다. 사내의 얼굴에 피가 아닌 붉음이 묻는다면 그 유일한 이유가 자신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1초에 수천 번 날갯짓을 하는 마물보다도 빨리 제 눈길을 피하는 사내가 퍽 우스웠다. 부족의 권력자를 손 안에 쥔 느낌은 마을 전체를 작은 구슬 안에 넣고 보는 것과 같았달까.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손에서 굴릴 수 있다면 남은 평생은 별 걱정 없이 행복하리라.

물론 사내는 고지식한 이였기에 사적인 감정으로 부족에 영향을 끼칠 이는 아니었다. 여인도 제게 무언가 특별한 것이 돌아온다거나 하지는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느낌, 부족 내의 입지가 공고히 된다는 것은 제 오만에 대한 쐐기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적의 결핍이여, 안녕히.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사내의 마음과 함께 전부 차지했음을.

 그리도 오만하게 착각했다.

 

 

 그러므로, 이상하리만치 사냥꾼들의 소식이 없었을 때 여인은 불안해졌다.

하루에 한 번, 오늘은 오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내 달이 몸을 부풀려 동그래진 것이 두어 차례 반복되었을 때엔 마을 길목의 끝에 붉은 점 하나가 보이지는 않을까, 목이 길어질 듯 내다보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떠도는 소문은 그녀의 맘을 더 불안하게만 했다. 여인의 신경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운명은 항상 상자 끝에 희망을 남겨두기 마련이므로,

몇날 며칠을 더 기다린 후에 정찰을 나간 이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벼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사냥꾼들의 기존 야영지가 흔적 없이 비어 있었다며, 자리를 옮겨 더 멀리 여정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말했다. 분명 사냥감이 부족했던 거겠지, 사막의 겨울은 매번 더 혹독해지니까.

 

그리고 운명은 남겨둔 작은 희망을 짓밟는 행위를 대단히도 좋아한다.

달은 세 번을 더 홀쭉해졌다. 마을은 동요했다. 더 일찍이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겠지. 남아있던 사냥꾼들로부터 근근이 음식을 조달할 수야 있었지만 이마저도 전과 같이 않았으며, 곳곳에서 희망을 잃은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모든 이들이 생존하는 일 따윈 이미 전제에 없던 일이었다. 슬픔은 일찍이 자리한 친구이며, 애도는 사치일 뿐. 부족은 당장 이번 겨울을 넘기는 것부터가 큰 고비였다.

 

그럼에도 희망은 비참하게도 뒤틀린 사지를 꿈틀댄다.

마음 한 켠에는 막연한 믿음이 뻗대는 것이다. 저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오만에 가까운 희망. 인류는 언제나 역경을 맞닥뜨리지만, 그럼에도 대는 이어져왔다. 저 또한 그러리라. 생존자들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자신의 씨를 뿌리지는 못하더라도, 운명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오늘은 아니라고 말하리라는 치기 어린 앙심.

이따금 사내의 얼굴이 떠오를 때에면 무언지 모를 감정이 자신을 집어삼키곤 했지만,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산 자는 살아야야만 하니까. 사내를 생각할 때엔 마물이 자신을 물어뜯는 듯한 고통이 가슴으로부터 퍼져나가곤 했지만, 일찍이 제 마음을, 차가운 냉소 아래 자리한 뜨거움을 알아차리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이 안에서부터 그를 갉아먹곤 했지만, 그럼에도 낮에는 그럭저럭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었기에. ...결국은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잊을 수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를 마주한 화톳불은 이야기했다.

가엾은 아이야, 너도 지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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