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매주 컨셉 하나

#04 유리병 속의 편지

련잉엥용 2024. 3. 13. 00:04
  • 장르: 조각 글. 빅토리아 시대. 회고. 편지.
  • 시놉시스: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가를 위해 남편을 죽인 여인. 그러나 문학가마저 죽고 그녀의 범행이 드러나자 유리 병 속 편지에 제 심경을 고백한다.
  • 기획 의도: 의도적으로 영문학 번역투를 활용해본 단편 글.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여성 주인공 소설을 좋아해 그 분위기를 모방해보았다. 이 또한 이전에 썼던 글을 다듬어 올려본다.

 


Dear, _________

 

누가 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녕하세요.

그곳의 날씨는 화창한가요? 혹은 폭풍우가 치는 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안의 당신은 부디 행복하길 바랄게요. 지금의 저는 우중충한 영국 날씨를 즐기며 차게 식은 홍차를 옆에 두고 있어 그다지 즐거운 마음은 아니랍니다.

그저... 오늘은 편지를 쓰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깃펜을 들어 무엇이라도 써내려가고 싶은 기분. 그러나 일기를 쓰기엔 과거 티끌처럼 작은 이야기까지 다 적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라 덜컥 겁이 났지 뭐에요. 어차피 보낼 사람도 더 이상 없긴 하지만 말이에요. 그래서 수신인은 정하지 않을래요. 내용도, 형식도, 중요하지 않게끔.

 

그 일이 있고 나서 벌써 한 달 남짓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길 줄 알았건만 여전히 일상은 흘러가네요. 실은 그 어떤 책을 집어들어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은 기분에 멈추게 됩니다. 책장에 적힌 그 분의 이름, 그 금박을 손가락으로 어루다보면 제가 미쳐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다른 이들의 책은 그 분의 것에 비하면 하등 보잘 것 없다고 느껴지니 이제는 그 어느 것도 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할 수 있겠군요. 참으로 슬픈 일이죠, 문학을 즐겨야만 차세대 인류에게 불빛을, 족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그분께 그토록 열띠게 이야기했건만. 이제는 눈물 탓에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바뀌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내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요.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숨은 너무도 쉽게 꺼지는 것 아니었나요?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어요. 심지어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죠. 무엇이든, 그가 명령만 내리면 되는데.

 

그래, 나는 위선자의 삶을 버리고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군요.

내 이야기를 들은 자들 중 몇몇은 도망치고, 몇몇은 고함을 지르고, 몇몇은 가엾이 여깁니다.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류는 퍽 신기해요. 그들은 그럼에도 나를 이해해주고 친절하게 맞아주어요. 친절하기도 하죠. 하지만 진심 한 가운데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죠. 어찌 되든 내 손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 이상 나에게 직접 그것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몇 없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들마저도 진실을 말했는지 의심이 되는걸요. 웃기죠, 그토록 원하던 신뢰를 얻었음에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는 꼴이.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겁니다. 이게 나의 벌일지도 모르죠. 사회적 동물로 태어나 인간을 제대로 사귈 수 없는, 결핍된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영원히 사랑을 갈구하고, 영원히 그것을 채우지 못하는...

안정된 삶만을 오롯이 즐길 수는 없을까요? 내 이름이 '테스'였던 시절, 자유롭고, 눈치볼 환경 하나 없이 맨발로 들판을 뛰놀던 시절. 아, 나의 인생 절반을 차지하던 것이 이제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군요. 남편의 폭언과 폭력.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는 빈 말로도 할 수 없겠죠. 그러므로 언제고 나는 나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일깨우고 계몽시켰으니, 나의 구원자를 위한 것이라면, 나를 위한 것인걸요. 하지만 이제 그는 없습니다. 내 안의 끝 없는 허기를 채울 것은 이제 없어요.

더이상 이것을 채울만한 매개체는 없는 걸까요? 사람에게 기대려고 했건만, 사람은 역시 불완전하기 때문에 나를 이 늪지대 같이 푸른 절망에서 끌어올려줄 밧줄이 되기엔 너무 연약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 해서 이 절망의 바다에 서로를 부표 삼아 부둥켜안고 망망대해를 표류하기엔 우린 모두 지쳤네요. 그럼에도 시도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실패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그저 어느 미친 여자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고 생각해주십시오.

 

이제 이 편지는 받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없이 익명에게로 붙여야 할까요. 혹은 한창 철 없을 적 그러했듯 유리 병에 담아 바다에 떠내려보낼까 고민도 됩니다. 아예 벽난로에 갈기갈기 찢어 태운 후 신께서 보시길 바라야 할 수도 있겠지요.

어느 쪽이든, 누구에게 닿든, 와닿지 않을 편지.

단 한 장의 종이의 무게가 무겁군요.

 

결핍은 어떻게 채워야 하나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면, 부디 익명에게로 회신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인생은 부족함 없이 행복하기를.

 

Yours truly,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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