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매주 컨셉 하나

#02 눈 먼 비르투오소

련잉엥용 2023. 12. 10. 23:50

 

  • 장르: 단편소설. 스릴러. 고딕. 메르헨.
  • 시놉시스: 바이올리니스트 멜은 최고의 비르투오소가 되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한다. 그러나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경쟁자가 생기자 그는 계약에 대한 불안이 생겨가는데…
  • 기획 의도: 스릴러 장르의 연습, 그리고 씬마다의 템포 조절을 연습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개인적으로 분량 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쉽지만, 오랜만에 긴 글을 쓸 수 있어 즐거웠다. (다시 보니 줄바꿈이나 이탤릭체 등의 서식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길래 늦게나마 수정했다. 다 쓴 글도 다시 보자…)특히 중반까지는 달리다시피 힘이 많이 들어갔는데 마지막에는 힘이 다 빠졌다. 이런 부분이 아쉽다고 생각되는 글.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탐낸다는 헛소리는 대체 누가 지어낸 거지?

멜은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침대 머리맡으로 뒷걸음질 치듯 물러났다. 온 몸의 땀구멍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눈 앞이 아득해지는 기분.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신이라도 믿으리라, 멜은 어리석게도 제가 불러낸 악마 앞에서 그리 생각했다. 악마는 멜의 옷장 깊숙한 어둠에서 목을 길게 빼고 웃었다.

“그래서, 계약을 할 건가?”

악마는 어느샌가 사색이 된 멜의 코앞까지 긴 몸을 뒤틀며 다가왔다. 구물거리는 뱀처럼 역겨운 몸짓을 보고 있자니 사로잡힌 먹잇감마냥 근육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힘겹게 달싹인 입술과 달리 목은 틀어막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멜은 겨우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겐 단 한 조각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멜의 긍정은 사실상 생존하고자 하는 마지막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무엇이든 할테니 목숨만 살려달라며, 멜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사로잡힌 먹잇감처럼 온 몸을 떨었다.

좋아, 짧은 대답을 남긴 그 혐오스러운 형체는 만족한다는 듯 관자놀이 까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계약의 방법조차 설명하지 않은 채, 악마는 소름 끼치는 몸짓으로 검게 비틀린 손톱을 멜의 이마에 대었다. 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이마를 가로질러 그어나갔다. 피부부터 신경, 심지어는 뼈까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지만 공포와 충격은 비명을 틀어막았다. 숨은 가파르게 치솟고 귓속에 심장 박동이 들리며 정신이 아득해지던 그때, 다섯 획을 그린 손 끝이 마침내 원을 그리며 별을 가두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목각인형의 줄이 잘리듯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 날 밤, 멜은 단 꿈을 꾸었다.

평론가들의 찬사, 대중의 사랑, 무한한 명예. 단순 공포에 사로잡힌 생존 본능이 아니더라도 악마의 혹독한 대가를 감수할 소원의 가치는 충분했다. 일평생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없던 아이는 바깥에서의 사랑과 인정에 대한 갈증을 가졌다. 바닷물로 목마름을 채우려는 망망대해의 표류자, 멜은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이마를 더듬으며 잠에서 깼다. 몇 초간 자신이 있는 세계가 어느 세계인지를 판단하며 멍하니 눈가에 문질러댄 손 끝엔 아무 요철도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어젯밤 일이 꿈인가, 한 차례 희망을 품고 몸을 일으킨 멜은 이내 옷장 앞 마룻바닥에 엉겨붙은 밀랍 양초의 잔해와 하얀 분필 가루를 보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는 느린 몸짓으로, 털썩 주저앉다시피 침대에 몸을 기대었다. 저질러버렸구나, 멜은 가느다란 탄식을 뱉었다. 어머니가 아끼는 도자기 접시를 깨트린 다섯 살 꼬마 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대가로 내준 것의 가치가 가늠이 되지 않아 불안이 엄습했다. 누군가에게 강한 꾸지람을 듣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졌나?

잿더미 같은 기분 한 가운데에 호기심이 새싹처럼 피어올랐다. 멜은 다시 이마를 더듬었지만 여전히 촉감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옷장 옆에 달린 작은 거울을 보아도 악마의 손 끝이 스친 자리는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제 이마는 작은 뾰루지 하나도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여전히 멜은 악마의 상징이 그려지던 그 자리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솜털이 서 있는 기분.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거울 속 제 모습을 응시했다. 여기저기 뻗친 곱슬머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하고 누런 셔츠를 입어 꾀죄죄한 사내가 시선을 마주했다. 세계 최고의 비르투오소가 될 사람 치고는 너무 소박한 까치집 머리였다.

그는 머리칼을 손으로 천천히 털어내렸다. 제 모습을 천천히, 뚜렷이 응시하던 그는 한 순간에 미치광이처럼 몸을 틀어 방을 가로질러 뛰어가더니 자신의 연습용 바이올린을 집어들었다.

멜은 악기를 조율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현에 활을 가져다대고는 몇 날 며칠 연습하던 곡을 시작했다. 연주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는 마음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별 문제 없이 이 곡에 온전히 맘을 빼앗긴 것마냥 충만한 감정으로 곡을 그려나갔다. 몇 날 며칠 항상 틀리던 구간을 너무도 유려하게 넘어갔다.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음은 그에게 희열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감탄이기도 하고 탄식이기도 한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는 제가 만들어낸 소리에서 숭고함마저 느꼈다. 악마의 재능에서 풍기는 숭고함이라니, 멜은 급기야 신을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이런 재능이라면 몇 개의 영혼이라도 더 바치리, 멜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치광이마냥 폭소하며 활을 움직였다. 그의 눈은 황홀경으로 충혈되었다. 그래,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바친 대가는 한낱 하찮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 어떤 대가도 이 재능보다 가치 있지는 않았다.

 

 

 

수백 명의 사람이 숨을 죽였다.

멜은 제 바이올린 활이 현에 닿기 직전, 그 짧은 고요를 무척이나 즐겼다. 모두가 자신의 재능을 목도하고자 긴장하는 그 순간에 멜은 무엇보다도 더한 희열을 느꼈다. 그는 기립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지는 관객석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악마가 그러했듯 관자놀이까지 찢어질법하게 큰 미소를 지었다.

천재의 탄생! 일간지는 그의 놀라운 데뷔를 노래했다. 모두가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그의 공연에 졸도하는 여인만 매 주 몇이 되었다. 내일은 타국의 백작이, 모레는 교황이, 다음 주에는 황제가 자신의 공연을 보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신의 작품을 연주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아들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편지가 그의 문 앞 계단을 메웠다.

아, 사랑은 달콤하구나.

그럼에도 그는 연습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갈증은 결코 한 순간의 엄청난 사랑으로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었기에 불안 또한 끝없는 것이었으므로. 이 행복이 언제 끝날지 몰라, 그는 속삭였다.

악마가 다시 한 순간에 제 실력을 앗아갈까 두려운 마음은 매일 밤 그를 옥죄는 족쇄가 되었다. 그는 그 어느 곳에서 잠을 청해도 고개를 들어 밑을 내려다볼 때에 익숙한 옷장이 자리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옷장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지켰다. 멜은 이따금 옷장 문이 끼이익 열리고 검고 가는 손가락이 차례대로 옷장 문을 젖히는 상상을 했다. 악몽을 꾸기도 하고, 환각을 보기도 했다.

악마는 언제나 무형의 손가락을 멜의 목에 대고 죄어왔다.

 

 

 

칼, 소년의 이름은 제법 평범했다.

어느 변두리 마을에서 태어난, 신분은 그리 높지 않지만 무역업으로 돈을 불린 어느 상인 가의 자식이라 했던가. 네 살부터 피아노를 쳤고, 다섯 살엔 작곡을 시작했으며, 여섯 살엔 스승을 능가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는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했다. 천사와도 같은 얼굴에 깃털과도 같은 선율! 대중의 관심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좇기에 사람들은 잠시 멜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다.

멜은 관리인에게 돈을 쥐어주고 무대 뒤편을 통해 소년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제 2의 비르투오소? 코른의 유망주, 화려한 데뷔! 그 주 신문의 헤드라인은 멜의 마음 한 켠에서 그를 성가시게 괴롭혔다. 비르투오소라니, 기껏해야 기교를 조금 부릴 줄 아는 촌뜨기 따위 경계하지 않으리라 제 자신을 위안하던 멜은 결국 불안에 굴복해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커튼의 그림자 사이에서 소년의 연주를 마주했다.

소년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섰다. 그는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가라앉히려는 듯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뒤, 바이올린을 들었다. 익숙한 적막이 회장을 감싸자, 소년의 첫 음이 울려퍼졌다.

저 또한 몇 번을 연주했던 곡, 몇 차례고 연주했던 곡이었으나 날카롭고 정교한 멜의 기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멜의 날카롭게 찌르는 음과는 달랐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맘을 간지럽히며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그의 연주는 분명 완벽하지 못했다. 기술적으로 아쉬운 요소가 일부 있었다. 하지만 멜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칼의 음악으로 투박한 황홀경을 맛보았다.

황홀경의 귀와는 달리 머리는 한 순간에 지옥으로 추락했다. 기름이 들끓듯 멜의 뱃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솟았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질투, 동경, 분노, 무력감, 배신감, 통탄, 한, 온갖 감정이 한데 뒤섞여 오물처럼 그를 뒤덮었다. 멜은 눈을 질끈 감고 소년의 재능을 부정하려 했으나 귀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진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주춤거리며 감정을 삭히려 애썼지만, 이내 성난 걸음으로 공연장을 벗어나갔다. 회장의 계단을 내려가던 때, 공연장으로부터 울려퍼지는 우레 같은 환호성이 멜의 마음을 수없이 짓밟았다.

 

 


멜이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마법진을 그린 후, 양초에 하나 하나 불을 붙인 뒤 더듬더듬 어둠의 문구를 읊조리자 옷장 문 경첩이 익숙한 소리를 내었다. 악마는 천천히, 검고 긴 손가락을 하나씩 문틈 사이로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여전히 그 광경은 오한이 들 만큼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웠다. 해골마냥 뻥 뚫린 눈 구멍은 빛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공허했고, 얼굴 가죽은 엉겨붙은 기름처럼 역겨운 검은 빛을 띄었다. 그의 혐오스런 웃음은 멜의 뼛 속 깊이 공포를 새겼다. 멜은 그 앞에서 알맞은 말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마른 입술을 떼었지만 겨우 네다섯 번째 시도에서야 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도 불안한 건가? 계약은 이행되고 있음에도.”

악마는 그 처량한 한 마디마저도 싹둑 자르며 말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늘게 웃으며 입꼬리를 찢어올렸다. 쯧쯧, 혀를 차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다. 멜은 그 태연하고도 뻔뻔스런 모습에 더러 욱하는 심정이 들었다.

“계약과 다르지 않습니까?”

뱉어내듯 튀어나온 목소리가 멜 자신을 놀라게 했다. 그는 악마의 반응을 살피며 움찔거리다 말을 이었다.

“나는 일류의 재능, 최고의 명성을 원했어요. 그러나 그 재능을 그까짓 촌뜨기도 가지고 있다면 비르투오소의 명예가 진정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명성이란 것은 자고로 유일무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악마는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이 텅 빈 눈으로 멜을 바라봤다. 멜은 차라리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바랬지만, 악마는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멜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는 위압감에 주눅 들며 악마를 다시 부르기로 했던 제 선택이 옳았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의 소원을 제대로 들어달란 말입니다. 나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내요.”

“욕심이 많군.” 악마는 짧게 응수했다. “계약의 대가를 치루고서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좋을텐데.”

멜은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제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느리게 뒷걸음질 쳤다.

영혼? 그런 건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네 눈이야.

그 탐스러운 두 눈 정도면 충분하거든.

눈, 악마가 제시한 대가는 비교적 단순한 것이었다. 어째서 악마가 눈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멜은 이것이 터무니없이 유리한 계약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계 최고의 재능을 시력 하나로 살 수 있다면야.

그러나 아무리 제 재능에 비해 하찮은 몫이라 해도 소중한 건 소중한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 건 언제나 아깝기 마련이니까. 악마는 잔뜩 경계 태세를 갖춘 멜의 모습을 보고는 재밌다는 듯 킬킬 웃었다.

“오늘은 가져갈 생각 없어, 그러니 더더욱 지금을 즐기도록 하게나, 초침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거든.”

악마는 긴 손톱으로 멜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멜은 그 이질감에 몸서리를 쳤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그는 명성을 잃기 직전의 벼랑 끝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져가도록 하시죠. 그리고 내 소원을 똑바로 들어줘요.”

“지금?”

악마는 몸을 젖히곤 우레와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기까지 했다.

“당돌하군. 하지만 모든 건 알맞은 때가 있는 법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악마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뻥 뚫린 눈구멍이 멜을 집어삼킬 듯 가까워졌다.

“이 계약의 우위는 내가 점하고 있어.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것을 추천하지.”

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다시금 사냥감으로서의 공포가 그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내 악마는 긴 손가락을 멜의 눈 위에 하나씩 덮어갔다.

“조만간 가져갈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도록.”

다시 한 번, 멜은 아득한 저편으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멜은 여전히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써 비르투오소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칼의 입지는 점차 비등한 수준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눈은 멀쩡했다.

멜은 불안감을 느꼈다. 어느 신문은 벌써부터 그와 칼을 비교하고 있었다. 그 기사는 기술로는 멜을 따라올 자가 없다며 그를 추켜세웠지만, 젊은 칼이 연주로 풀어낼 수 있는 감정의 깊이와 이로 인한 잠재력에 탄복했다. 물론 멜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칼 따위의 촌뜨기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것이 매우 무례하다며 신문사에 탄원 편지를 보냈기에 그 후속 기사가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 일은 멜에게는 거슬리는 일이었다. 아직까지 멜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멜은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그의 부모님은 날 선 성질이 연주에 영향을 끼칠까 (정확히는 이로 인한 수입에 영향을 끼칠까)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그는 바뀌지 않는 상황에 어린 아이가 그러하듯 분노를 사방에 내비쳤다. 그의 작업실은 온통 찢어진 악보와 부러진 활로 가득했다.

그리고 편지는 어느 겨울날에 도착했다.

남부 해안가의 바지니 일가로부터의 후원금이 줄어든다는 소식이었다.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 없이 일가의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는 유감의 말 밖에 적히지 않았으나 불길한 예감이 멜의 뇌를 스쳤다. 일전에 바지니의 장남이 칼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멜은 초조하게 방 안을 걸어다녔다. 그는 악보를 두어 장 더 찢은 뒤에야 이성과 비슷한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인은 칼에 대해 유의미한 정보를 들고 오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 전보다 더 사치스러운 물품을 사곤 한다는 뜬소문을 들었다 했다. 다소 불분명한 정보였지만 아무래도 그가 이곳 저곳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전에 멜이 조소와 함께 내쳤던 한 예술가 집단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최고라 칭송한다는 소식 또한 들려왔다. 멜의 불안이 극에 달하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는 당장 하인을 시켜 제 모든 약속을 미루고 칼에게 서신을 보내라 지시했다.

 

 

 

거장과 유망주의 합동 공연이라는 소식에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심지어는 가짜 티켓이 성행하니 주의하라는 기사마저 날 정도였다. 온 도시가 둘에게 주목했다.

변두리에 위치한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 뒤편은 제법 싸구려 느낌이 나는 벽지에 이곳저곳 해진 가구가 많았다. 멜이 공연하기엔 한 없이 부족한 장소였다. 멜은 찻잔 속의 티스푼을 둥글게 굴렸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티스푼은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그는 몇 분 간 다 식어버린 홍차를 젓기만 하고 있었다. 그 아무도 멜의 모습을 보고 쉬이 말을 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불편한 소음은 칼의 부산스런 등장으로 지워졌다.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와 멜에게 열정적으로 악수를 청했다. 그는 몇 번이고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장을 만나뵈니 정말 영광이에요!”

멜은 언짢다는 듯 흔들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자 칼의 시선이 이를 따라갔다. 그는 황급히 앗, 하고 손을 놓았다. 멋쩍은 미소 뒤에 열성적인 말이 이어졌다.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에스트로. 이 기회에 저를 불러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퍽이나 열심이군, 멜은 말 없이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대꾸할 생각조차 없이 오만한 표정을 하고는 금세 나가보라며 칼에게 손짓을 했다. 칼은 자신을 홀대하는 그의 가벼운 손짓에 담시 당황했지만 이내 뒷걸음질로 물러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멜은 다시 불협화음을 내는 티스푼으로 손을 뻗었다.

으레 합동 공연이라 함은 일전에 합을 맞추어보는 것이 관례였지만, 멜은 그간 몸이 아프다는 이유나 바쁘다는 핑계로 이에 전부 불참하고 집에만 칩거했다. 물론 그곳에서 가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멜은 제 몫의 연주를 그 어느 때보다 진중히 연습했다. 상대를 무참히도 짓밟기 위해 그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객관적으로 그의 연주는 완벽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수준의 기교와 기술, 멜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또 시험했다.

 

 

이번 공연과 관련한 신문은 종류가 무엇이든 모조리 가져오도록.

성공적인 공연 이후, 멜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하인의 보조에 따라 거추장스런 공연복을 한 꺼풀씩 벗어나가며 지시했다. 천이 한 조각씩 떨어질 때마다 그의 불안도 한 조각씩 떨어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의 연주는 한 점 오차 없이 완벽했고, 그의 기교는 그 누가 듣더라도 칼의 것보다 훌륭했다. 모두가 그 사실을 공고히 새겨들었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제 하인에게 돈 몇 푼을 더 쥐어주며 피곤할테니 신발이나 한 켤레 더 사라는 말까지도 했다. 미소가 그의 입을 떠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한 이불로 파고든 멜은 오랜만에 아무 걱정도, 아무 꿈도 없이 편안한 잠을 잤다.

 

 

새로운 거장의 탄생!

이른 아침, 달갑지 않은 문구가 그를 반겼다. 멜은 인상을 구기며 찢을 듯한 기세로 신문을 펼쳐들었다.

둘의 연주는 황홀의 극치를 선보였다.
그날 밤은 평생 남을 기억이라는 사실은 그 날의 관객 모두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칼의 선율은 환희로 가득했다.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멜의 완벽하리만치 탄탄한 기교는 칼의 감정선을 제대로 뒷받침했다. 칼은 멜의 음악 스타일에 대해 극소수의 인물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딱딱하고 날카로운“ 연주에 대한 완벽한 보완이었다.
연주를 따라가며 놀라움을 느껴야 했던 멜의 연주와는 사뭇 다른 감정선이었다. 칼은 관중의 손을 잡고 새로운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듯 부드럽고 풍부했다. 감히 이야기하자면 칼의 데뷔는 음악사 상 새로운 국면의 도래이다.

믿을 수 없군, 멜은 짓씹듯 중얼거리며 신문을 단숨에 주먹만한 크기로 구겼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는 종이를 방 저편으로 온 힘을 다해 내던졌다. 저급한 기자의 뭣모르는 기사가 맨 첫 기사라니. 그는 저의 불운에 거칠게 목 깊이서부터 으르릉대는 소리를 내더니, 숨을 씨근대며 다음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한 층 더 구겨졌다.

하나 둘, 구겨지고 찢기는 신문이 늘어만 났다. 하인들은 뒤늦게나마 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들은 전부 바짝 솟아 굳은 어깨로 금방이라도 벽에 흡수될 듯 구석으로 뒷걸음질해서는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이내 멜은 고함을 내지르며 마지막 신문을 북 찢었다. 그것이 제 엄지손톱보다도 작아질 때까지 찢어내더니 이를 하나하나 짓밟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어느 하나 멜의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화병을 집어 던졌다.

산산이 부서진 파편들이 그의 맘에 비수처럼 박히듯 가슴이 타들어갔다.

 

 

 

어렸을 적,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일 때에 나간 토끼 사냥에서 마주한 첫 죽음.

눈처럼 흰 토끼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목뼈가 부러졌더라지.

그만큼이나 살인도 쉬웠다. 바이올린을 잡고 섬세하게 음을 설계하던, 도자기와 같이 새하얀 손가락이 칼의 목을 죄었다. 칼은 사람의 소리가 아닌 기이한 음을 내며 목울대를 움직이려 애썼다. 손톱이 멜의 손을 긁어대고 다리가 바르작거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멜의 손은 부들거렸고, 이에 맞추어 실핏줄 터져 붉어진 칼의 눈은 더 빠르게 진동했다.

멜은 점차 격렬한 움직임이 잦아들고, 심지어는 온기가 식을 때까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석상마냥 그의 눈은 공포와 분노에 질린 채 부릅 뜨고 칼의 죽음을 응시했다. 그는 천천히, 힘 잃은 몸뚱이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차례차례 하나씩 떼었다. 피가 통하지 않았던 탓인지 유난히도 손가락이 길고 검어보였다. 멜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몸을 일으켰지만 눈은 칼에게서 떼지 않았다.

죽은 흰 토끼는 눈을 감지 못한 채 목이 꺾여 있었다.

그리고 악마가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속삭였다.

“재밌군, 멜. 결국 천상의 재능을 꺼트렸어.”

터져오르는 엔도르핀의 열기가 악마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한기와 부딪혔다. 자연히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여전히 멜은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 가져가요. 눈 따윈 필요 없으니.”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멜이 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고, 어느 때보다도 격정적인 어조였다. 그러나 악마는 그 말을 듣고는 킬킬대며 웃었다. 그것은 우레와 같은 폭소로 변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멜의 눈을 찔러오듯 눈구멍을 긁었다.

“어리석은 것, 네 눈은 이미 가져간지 오래인데도.”

악마에겐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계약이었다. 신의 작은 장난감, 아주 예쁘게 빚어둔 오르골 위의 도자 인형같은 칼이 태어나던 날부터 벼르던 순간. 그 새하얀 인간을 제가 망쳐버린 영혼으로 파괴하고, 그 영혼마저 남김없이 갈취한다. 이번 판은 악마의 승리였다. 

악마의 말과 동시에 푸른 복장의 장정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뒷편에선 호들갑을 떠는 하인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멜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비명 또한 들려오는 듯 했다. 멜은 그럼에도 일절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좁아지고, 좁아진다는 감각은 느끼지 못했던가?”

경찰이 멜의 손을 뒤로 꺾어 등 뒤로 돌리고, 그의 얼굴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짓눌렀을 때, 그제서야 멜은 고개를 치켜들어 악마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엔 여전히 순수함이 남아있었다.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함.

그것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눈에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의 눈에 감정은 없었으므로.

하얗게 반짝이는 눈에는 핏줄 하나 터지지 않았다. 그의 눈에 뇌로부터 흐르는 혈액은 도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눈을 결코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진실이 파고들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검었다.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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