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 조각 글. 판타지. 동양풍. 서문.
- 시놉시스: 절대자의 뜻에 따라 사도로 파견된 주인공. 그는 처음 악한 세계에 들어서서 뜻하지 않은 조력자를 만나게 되는데...
- 기획 의도: 오랜만에 개인 글을 써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졸작의 기반이 되는 글. 하지만 이왕 쓰는 김에 나가보려 했던 공모전이 열리지 않았고, 막상 쓰다 보니 자꾸 시간이 나지 않고 일이 너무 바빠져서 나아중에 다시 써보기로 한다.
0. 서문
밤이 오면 구슬피 우는 자여 내 목소리 듣거라
나는 너의 별, 너의 인도자이니
아해 이매야, 네 운명의 실 이어진 꼴 보아하니 참으로 기구하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유연하지 못하나
타오르는 불처럼 열기 넘치는 성미를 가졌으매
네 두 발 딛은 땅처럼 우뚝 섰을지 몰라도
무쇠처럼 굳세게 나아가지 못하며
흐르는 물만치 유연히 세월에 몸을 맡기지 못하는구나
미련 많은 생으로 태어나 미생으로 죽을 운명, 이매야
길고도 불운한 명줄 굽어살피어 기회를 주나니
나의 명, 나의 힘을 빌려 저 멀리 악한 것 득실대는 수라도로 향하라
거룩한 뜻에 반하여 함부로 명을 탐한 치들
저들의 빈약하고 삿된 기준으로 세운 나라
필히 무너트리어 내 권능을 빛내어라
그리하면 내 네게 안온한 생을 주겠나니
범부 이매여,
나의 사도가 되어 수라를 멸하라
1. 도입
서늘하다, 그것이 첫째로 느낀 감정이다.
오싹하다, 그것이 둘째로 느낀 감정이다.
쇠 맛 나는 차가운 공기가 솜털을 일으킨다.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면 새벽녘 묘지와도 같이 푸른 풍경, 빽빽한 나무 사이로 도깨비불이 일렁인다. 고요하지만은 않다. 부엉이인지 소쩍새인지 모를 산새들이 구슬피도 운다.
걷다 보면 웃자란 솔잎이 살갗을 쓸어내린다. 허우적 손을 휘저어 나뭇가지를 걷어내며 돌길을 따라간다. 침침한 빛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홍살문이 허상이 아니길 바라며 나아간다. 이매는 이곳에 오기로 한 제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찰나 동안 의심한다.
금방이라도 제 옆으로 수라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에 숨을 죽이고 수풀을 헤친다.
“게 누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공기를 뚫고 귀에 박히는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떤다. 수라 병사로 추정되는 우렁우렁한 목소리. 그러나 지금 이 서늘한 공기 가운데에서는 수라 병사라 할지라도 반길 것만 같다. 물론 그럴 수는 없으니 조용히 태세를 살핀다.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거야. 네,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몸을 그리 쉽게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
… 수라 병사도 저리 겁을 먹던가?
영 이상하다는 생각에 무어라 판단을 내리기도 전,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불빛이 눈앞을 에워싼다.
“찾았다! 네 놈 자식, 치사하게 암습을-”
눈이 부셔 팔을 앞으로 휘둘러내자 무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팔에 부딪혀 공중으로 나가떨어진다. 그것은 아야야, 소리를 내더니 영 시원찮은 톱니 소리를 낸다. 지금이 기회란 생각에 곧바로 그것을 제압해 내 바닥으로 콱 짓누른다.
“너야말로 뭐지?”
“으악, 잘못했어! …요!”
무언가 손가락 사이로 바르작댄다.
“호… 혹시 이곳에 사는 수라님 되시나요…? 그렇다면 일단 멈춰봐요! 전 정말 우호적인 기체예요. 정말이라고요!”
그제야 제압한 것을 살피니 정말 작은 기체이다.
인간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며, 명계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형상으로 전선이 여러 개 달린 각진 몸체를 하고 있다. 크기는 한 뼘 반이나 될까 말까. 그것은 시무룩한 기계 소리를 내곤 화면에 슬픈 표정을 띄웠다.
“에헤헤, 오해한 건 미안해요. 그치만… 그치만 일단… 헤엑, 일단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수라님! 제가 말이죠, 제가 이곳 수라도에서 수라님들을 보조하려구 저어기 먼 명계에서부터 열심히 날아왔단 말이죠!”
그것은 손가락 사이로 부르르 움직이려 하다가 이내 강한 완력에 포기하곤 헥헥대기까지 한다. 퍽 사람다운 모습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살면서 이런 행보를 벌이는 기체는 듣도보도 못했다. 헥헥대며 변명을 늘어놓는다거나, 명계에서 수라도로 넘어가는 기체라니… 인공지능 기체 연구원이 안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할 것이다.
“아직 네 신분을 밝히지 않았어.”
“아,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에헤헤, 저도 참 덜렁거린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명계에서도 하 소리 들었지 뭐에요.“
…이렇게 말이 많은 기체도 처음이다.
“저는 초랭이라 불러주시면 되어요! 정식 명칭은 따로 있긴 하지만… 그건 다소 딱딱하거든요. 참고로 그건 여기 제 등에도 적혀있어요! TS0RVNG_II라는데, 원래는 Tal Supporter ver.0 Road-View Navigating Guider II라던가? 에헴, 로마자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이 몸은 첫번째 버전보다는 훨씬 기능이 많이 탑재되어 있다고요! 아직은 시제품이긴 하지만요. 아무튼 인공지능 길잡이 기체라는 걸 이렇게나 길고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한 이름일 필요는 없잖아요? 명계 연구원들도 차암…”
제가 잡힌 것도 잊었는지 나불나불 말도 많다. 아무리 봐도 이 기체는 불량으로 보인다. 이러나저러나 이곳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기체다. 기껏해야 명계의 길 정보나 담고 있을 것이다.
“잘못 파악했다, 난 수라가 아냐. 오히려 반대지.”
손가락이 전원 버튼을 향한다. 기체가 움찔, 몸을 진동하더니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으아아, 잠깐 잠깐!!! 이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 안 있어! 내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급기야 기체는 귀를 찢는 듯한 전자음을 내기 시작한다. 무거운 공기를 찢는 소리에 새들이 퍼드덕 날아간다. 이대로는 주변에 무언가 일이 발생했다는 걸 널리 알리는 꼴이 될 것이다. 당황한 이매는 잽싸게 전원 버튼을 누르려 하지만 당황한 틈을 탄 기체가 손가락에 전기충격을 주는 바람에 놓치고 만다.
이런 기능을 사용하다니, 이 기체는 불량품이 틀림없다.
“헤엑, 헤엑. 그러니까 기체 말은 끝까지 들으랬지! 수라가 아니라면 너도 어차피 명계인일텐데, 피차 같은 입장이면 좀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어디 덧나나!”
기체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듯 웽웽댄다. 그러나 틀렸다, 기체는 명계’인’이 아니다. 그러나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하고, 경계 태세를 유지한 채로 말을 이어 듣는다.
“나도 여기 온 게 서러워 죽겠는데… 으익, 항구까지 숨어 들어온 것도 조마조마했고, 전산망을 온통 뒤져서 수라도의 지도를 알아내는 것도 힘겨워 죽겠는데 막 도달해서 종료되면 얼마나 허탈하겠냐구! 응? 네가 내 심정을 알아?”
수라도의 지도를 알아냈다니.
“너, 이곳에 대한 정보가 있어?”
“그럼! 아무리 수라도라 해도 어쨌든 한 때 명계에 속해 있던 섬 아니겠어? 기본적인 길이나 요지는 전부 이전 자료가 남아있지. 헤헤, 군사 자료까지도 뒤져내느라 회로가 타버릴 뻔했지만.”
“... 수라도의 중심부에 가려 하는데, 길을 알려줘.”
기체는 공중에서 몸을 그대로 멈추곤 화면에 띄운 눈을 잠시 껌뻑인다. 기가 차다는 듯 증기가 머리 위로 쉬익 뿜어져나온다.
“뻔뻔하기도 해라. 방금 전까지 날 종료하려 든 사람에게 내가 뭣하러? 흥, 퉤. 너 같이 기체 소중한 줄 모르는 인간은 수라도에나 떨어지라지! ...아, 잠깐. 여기가 수라도구나.”
“… … …”
맥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한 가지 제안을 할게.”
먼저 입을 연 건 이매이다. 어쩌면 이 기체는 생각보다 제 여정에 많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이매는 부여받은 임무와 권능을 빼놓고는 이곳 수라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명계에서 수라도의 정보를 알아들려 하는 행위는 곧 수라 될 자나 하는 짓이다. 신의 사도로서 임무를 파견받아 왔건만, 이렇게나 불친절한 임무일 줄은 몰랐다.
“날 도와. 그럼 너와 나는 다시 명계로 돌아갈 수 있어.”
“뭐?”
“난 명계의 삶이 지루하다든지, 수라가 되고 싶어서라든지 하는 이유로 이곳에 온 게 아냐. 오히려 반대지. 천지신명께 명을 받고 수라도를 멸하러 왔으니까.”
이매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라고 할만한 몸체 부품을 빙글 돌린다.
“네가… 사도라고?”
“보아하니 네가 수라도에 오게 된 건 자의보단 타의에 가까워 보이는데. 만약 내가 성공한다면 우린 명계의 영웅으로 귀환할 수 있어. 더는 이곳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돼.”
당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이곳의 공기는 중력이 다르기라도 한 듯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 듯하다. 이매의 말이 맞다, 이곳은 그다지 오래 머무르기 좋은 곳이 아니다.
기체는 말을 곱씹는다.
“너, 너… 네가 수라를 멸한다고? 아무리 봐도 신의 사도라기엔 약해 빠져 보이는데… 더군다나, 누구 멋대로 추측하는 거야! 내, 내가 타의로 이곳에 오다니, 누가 그렇게 말을 해? 난 내 자의로 이곳에 왔어, 아무도 날 내쫓지 않았다구. 연구원 나부랭이와는…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래서 내 진가를 알아줄 수라도로 향한 거지!”
“수라가 네 진가를 알아준다니, 신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네 뜻을 이해하기나 할까?”
길잡이 로봇은 말문이 막힌 듯 진동음만 빨라진다.
“나는 네 진가가 보여.”
“네가?”
“그래, 수라도의 길마저도 알고 있는 길잡이 기체라면 과연 명계의 영웅이 되기에 마땅하지. 수라를 멸한 기체라, 그 연구원들의 ‘의견 조율’에 대해서도 타당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기체는 별 말이 없지만, 움직이는 양상이 부드러워진다. 그는 고심하는 체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으음, 하는 고민 소리를 모방해낸다. 이럴 때엔 약간의 압박을 넣어주면 그만이다.
“싫으면 그만이야. 나는 누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바람에 변방 군사가 오기 전에 어서 피신을 해야 하거든.”
“자, 잠깐!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네가 진정으로 천지신명의 인정을 받은 사도인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한낱 사기꾼이 아닌 걸 증명해내. 그럼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글쎄, 인간의 운명을 파악하는 기능은 모든 기체가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
기체는 미심쩍다는 듯 한 차례 주춤하고는 이매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한 바퀴를 빙글 돈다. 이내 기체는 잠시간 눈을 감더니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떤다.
본디 여덟으로 이뤄져야 할 기둥이 열이다. 고르게 분배된 오행은 각기 두 개씩 고르게 자리해 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나무판자로 빚어진 술통처럼 조화를 이룬다. 기체는 이 정보를 받아들이려는 듯 이리 빙글, 저리 빙글 돈다.
“신기하네, 신기해. 이런 운명은 확실히 처음 봐. 수라의 운명과도 다른걸! ...상서로운 운명이란 말은 여기에 쓰는 건가봐. 너도 그런 네 운명을 알고 있었어?”
이매는 그에 대한 답은 없이 질문으로 받아친다.
“수라를 만난 적이 있나보지?”
“-아니. 그냥 인간이 아닌 걸 식별해내기 위한 자료만 있고 수라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 수라 같은 게 명계에 있을 리가! 그랬다간 진즉 신이 분노했을 거야."
이매는 말이 없다. 견디지 못하고 흘러넘친 신의 분노는 사도라는 명칭으로로 발현되어 그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주었다. 그는 신의 분노로 인해 이곳 수라도에 당도해있다. 그 말은 삼키고 차분히 기체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음… 그래. 네 기운이 초월적이라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걱정되는걸! 수라는 하나의 행을 집중적으로 키웠다던데. 그걸로 공격해오면 네가 어쩔 셈인지 궁금해. 네 운명은 상서롭긴 해도 강해보이진 않는데.”
“글쎄, 내가 수라의 그릇된 행을 회수해가야 한다면?”
“...음! 처음은 어려울 지 몰라도 행이 쌓이면 쌓일수록 넌 점차 강해지겠지.
기체는 이매의 주위를 한 바퀴 빙글 돌고는 신이 난다는 듯 증기를 한 차례 내뿜는다.
"과연, 신은 이런 것까지 다 생각을 하는구나! -기이하네, 기이해!”
그는 마음을 굳힌 듯 이매의 가까이 다가간다.
“좋아, 사도님. 이 몸이 친히 여정에 동참해줄게. 어디든 길을 안내하는 데엔 이 몸이 빠질 수 없으니까. 이번엔 사도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지!”
이매는 고개를 끄덕인다. 여정 내내 이 말 많은 기체의 비위를 맞춰줘야 할 것 같다는 예감에 조금은 피로해지지만, 그럼에도 수라도 길에 길동무가 생긴다는 건 여전히 좋은 현상이다.
“이쪽에서 난 소리인가?”
멀지 않은 곳에서 말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여럿이다. 아무래도 이전의 전자음 소리에 수라도 병사들이 순찰을 나온 모양이었다. 불필요한 전투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상책, 이매는 수풀 사이로 숨어들어간다.
“게 누구인가!”
으름장을 놓으며 가까워지는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초랭이가 아직 밖에 나와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숨지 않아도 비행 소리가 작지 않은 기체인만큼 눈이나 귀에 띄인다면 낭패다. 이매는 눈짓과 손짓으로 근처 수풀에 숨을 것을 지시한다. 허나 기체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눈을 껌뻑댄다. 긴박한 맘에 더 큰 수신호를 해봤지만, 되려 기체는 병사들의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맞닥트린다. 이매는 얼굴을 구긴다.
“여봐라 수라들아!”
일전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기체가 병사들을 호령한다.
“뭐, 뭐지. 명계의 기체 따위가 어찌 수라도에 발을 들인 거야?”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그렇게 말을 쉽게 하는 거지? 너희 삿된 것들을 싸그리 없애버릴 사도님이 앞에 있는데도!”
초랭이는 급기야 수풀을 작은 기계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한다. 붉은 옷을 입은 다섯 병사는 어둠 사이 이매와 눈을 마주하곤 멈칫, 눈을 가늘게 뜬다.
아무래도 불량품 기체를 일행으로 들인 것은 그릇된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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