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매주 컨셉 하나

#01 완벽을 부술 결심

련잉엥용 2023. 11. 28. 13:56

 

  • 장르: 수필. 자전적.
  • 시놉시스: 주컨하를 통해 작문 실력을 재활하려는 이유를 담백한 문체로 작성한다.
  • 기획 의도: 첫 주컨하 글이므로, 창작 글보다는 가벼운 시작으로 나의 생각을 표현한다.

 



임팩트 있는 첫 문장은 언제나 어렵다.

특히나 그것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 글, 첫 문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으레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어 ”오, 그래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그게 잘 쓴 글의 첫 단추라고들 한다. 뜀박질을 할 때와 마찬가지다. 첫 발걸음에 힘이 실리면 속도가 붙는 것은 금방이니까.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첫 문장에서 말문이 막힌다. 이거다, 싶은 문장이 나오기까지 첫 문장을 계속 갈아치운다. 어렵사리 정한 첫 문장도 퇴고를 하다보면 그 임팩트가 전보다 덜하게 느껴져 몇 번이고 다시 깨부수곤 한다. 흡사 도자기의 흠결을 따지는 장인 정신과도 같다. 이런 성질은 나의 완벽주의에서 기인한다.

오래지 않은 인생 동안 나는 언제나 나를 창작자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제법 부끄러운 창작자였다. 언제나 나의 글을 내보이는 것에 부끄럼을 많이 탔다. 공들여 쓴 뒤에 몇번이고 퇴고를 거친 후에야 내미는 글에는 비평이 아닌 칭찬만이 붙기를 바랬다. 모두가 나를 인정하길 바랬고, 나의 글이 천재적이고 완벽하게 여겨지길 바랬다. 이렇게 하면 소소한 뿌듯함은 느낄 수 있어도 발전하는 창작자가 되지는 못한다. 발전을 위해서라면 겸허히 피드백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처음부터 완벽하고 싶어했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평판을 쉽게 얻으려다 부끄러운 커리어를 쌓았다.

과거 나는 이를 알지 못하고 완벽주의를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완벽에 대한 강박, 워커홀릭만큼이나 멋있는 말이었다. 완벽주의는 결국엔 내 글이 완벽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더럽고 거친 글보다는 정갈하고 예쁜 문체를 선호했던 나였기에 나는 내 완벽주의에 당당했다.

그러나 완벽주의는 신 포도와 같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며 내가 가진 것이 결국은 남들보다 나은 것이라도 치부하는 대단한 회피 성향일 뿐, 실패를 향한 두려움을 ‘겁 먹어 포기하는 것’이 아닌 ‘신중한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우는 대단한 콩깍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때로는 이런 완벽주의가 실용적일 때도 있겠지만, 성장에 있어서는 굉장히 해로운 버릇이다. 왜냐고? 칭찬만을 듣고자 하니까. 내가 과거 집필한 작품들을 살피면 문장력에 비해 문장의 완성도는 높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작품이 몇 되지 않으며, 그 깊이가 그다지 깊지 않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걸 속 빈 강정이라고 부른다.

이걸 모르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실력 부족을 회피하고 싶던 나는 다른 사람의 잘 된 작품을 보고 배아파하면서 나도 “각을 잡고” 쓰면 저 정도는 나온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위선자가 됐다. 단숨에 훌훌 써내려가는 천재 작가들을 선망해 나 또한 그럴 수 있으리라 믿으며  퇴고 없이 완벽한 글을 쓰기를 바랬다. 글의 깊이보다는 문장의 기교에 집중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내가 저것보단 잘 차겠다’며 축구 경기 화면에 대고 으스대는 사람과 다를 게 뭔가?

완벽주의가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사실 비교적 최근이다. 언제나 내가 잘났다고 여기는 과거를 지나 어느 정도 겸허해진 지금의 내가 되어 과거의 나를 바라보면 나는 항상 노력 없이 ’탑 티어‘가 되려 대단히도 노력했다. 나는 특별하니까, 나는 똑똑하니까.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고, 어느 분야에나 천재는 있다. 그렇게 나는 어느 하나를 특출나게 잘하기보다는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손을 대고선 ‘비전공자 치고는 잘한다’는 말에 안주하려 했다.

그리고 신 포도의 연속이 이어졌다. 다른 큼직한 이유들도 있기야 하지만, 지금까지 속내를 숨긴 저런 이유들도 더러 존재했다. 가령 나는 경쟁률이 높은 소설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구장창 바늘 구멍 같은 공모전을 노려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소설을 포기했고, 상업적인 아트 스타일을 다시 배우기 위해 몇 날이고 재미 없는 기본기 공부를 해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게임 아트 직군을 포기했으며, 지금 와서야 MMORPG의 엔드콘텐츠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시스템 기획이나 밸런싱 기획의 최강자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나는 이쪽보다는 저쪽이 잘 맞더라, 저쪽에서도 특별히 이것이, 그런데 이것에서도 이 부분은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이것저것을 놓다보니 더이상 놓을 게 없게 되어서야 나는 나를 돌이켜봤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한 실력과 경험, 부족한 인사이트. 내가 잘났다 한들 증명할 수 없었고, 증명할 수 있다 한들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위태로운 실력이었다. 흉내내기에 바쁜 수준.

그러므로 완벽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완벽주의는 나의 적성보다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므로 발전을 이끌어낼 수 없다. 애초에 적성이란 무엇인가? 적성이란 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내가 잘하는 것, 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적성은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남들은 이걸 이만큼씩 하지 않는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월등히 잘하는 것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적성을 찾기보다도 포장하는 것에 급급했던 것이다.

내가 그동안 이런 실력으로 자만해왔다는 게 제법 부끄럽다. 핑계를 대자면 성공 확률이 높은 것들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으나, 당연히도 이것이 내 모든 권태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어릴 때 으레 하는 실수라고도 변명을 해보지만, 변명을 하든 후회를 하든 이것이 더이상 나의 시행착오와 고민을 줄이지는 않는다. 이제 더 합리화해봤자 맘이 더 편해지지도 않는다. 마침내 그런 비건설적인 마인드셋을 벗어날 때가 됐다고 느꼈다. 체력과 여유가 있는 지금, 바뀔 때가 왔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 간의 일이 도움이 아예 되지 않았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경험을 통한 인사이트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의 내실을 다지는 근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글을 사랑하고 창작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도전이 필요하다. 감성을 다시 되찾고, ‘오글거리는’ 문장을 많이도 써야 한다. 덕후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조금… 너무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마음으로. 이제는 질이 아닌 양에 신경써야 하는 시간이다.

여전히 나는 부끄러운 창작자이다. 많이 쓰고, 많이 내보이고, 많이 질타 받아야 한다. 먼지 쌓인 작문 근육을 다시 튼튼히 하려면 두 배로 열심히 해야 한다.

겸허해지자.

성장을 위해 완벽을 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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