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라노벨식 제목을 지어본다.
그런데 사실이다.
들어가며
나는 게임 업계에서는 다소 특이 케이스의 전직을 했다. 아트 직군에서 기획 직군으로 넘어왔기 때문. 물론 아주 엄청난 특이케이스!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비교적 많은 게임 업계 지망생을 봐온 중에 나 같은 사람은 지금껏 딱 한 분 뵈었다. (그리고 그 분은 취업 잘 하신 것 같다. 기운 받아갑니다.) 프로그래밍에서 기획으로, 또는 기획에서 프로그래밍으로 전직하는 분들은 많이 뵈었고, 가끔 아트에서 프로그래밍으로 전직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외의 전직은 애초에 별로 보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라면 아무래도 비교적 아트가 하는 분야와 기획이 하는 분야가 잘 겹치지 않기 때문일 것 같다. 사실 나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도 이렇게 쉽게 전직을 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상황 설명을 더 자세히 하자면 다음과 같다...만, 정말 길어졌다. 일지의 탈을 쓴 긴 일기장이다. 읽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다구.
1. 소설가를 꿈꾸다
게임 쪽을 꿈꾸기 전까지 난 원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이전 회고록에서도 많이 했으니 건너뛰자. 그리고 그런 창작의 피가 흐르는 내게 있기 때문일까,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상상들을 시각화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아마 누구나 그러지 않을까 싶다. 청소년기에 스토리 매체에 빠졌던 전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이런 경험 있지 않은가? (아닐지도.) 내가 생각하는 내 최애의 모습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가물가물한 상상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림 그리는 게 내게는 잘 맞았다.
글 쓰는 일도, 그림 그리는 일도 너무나도 즐거웠다. 중고등학교 내내 글 동아리, 그림 동아리를 들었고, 문집과 일러스트집을 냈다. 둘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냐 한다면 고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더 오래 해온 쪽은 글이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입시를 준비했고, 결론적으론 영문학 계열의 과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소설가가 될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것은 명확한 틀 안에서 뛰놀 때의 이야기였다. 내가 나만의 들판을 가꾸고 그 위를 뛰노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창작은 좋아했지만 세계관이라든가, 기본 스토리라든가, 기반이 있는 창작을 좋아한달까. 또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스토리를 원했기 때문에 나 외에도 다른 사람이 관여하는 스토리를 좋아했다. (그런데도 이 때까지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은 나도 대단하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글을 쓴 뒤에야 나의 세부적인 적성이 소설가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 적성에 그나마 맞는 글 작업인 2차 창작만 하며 평생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창작자로서 좀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그리고 코로나가 찾아왔다. 갓 스무 살, 새내기 생활을 즐겨야 하던 때에 칩거했다. 그리고 그 때 게임을 접했는데, 그게 바로 그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이다. 게임 폐인마냥 하루에 몇 시간이고 야숨을 했다. 하이랄을 구하는 건 뒷전으로 두고 하이랄의 곳곳을 누볐다. 지도를 보면 링크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엔드 콘텐츠의 엔드 콘텐츠라고 하는 코로그도 900개 가량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중 아마 4-500개 정도는 모았을 거다.
사실 운동을 하겠다 선언하고 링피트를 하겠다며 산 닌텐도 스위치였는데 (물론 링피트도 하긴 했지만) 그걸로 야숨을 하며 진로가 바뀌어버렸다. 특히 그림 쪽으론 재능을 펼칠 수 없던 소설과 달리 내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데 게임에선 이 둘 모두를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게임에선 내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업계의 전망이라든가, 개인적으로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세부적인 적성 같은 부분들도 한 몫 했고.
그렇게 게임을 꿈꾸게 된 나는 코로나로 인한 규제가 완화되며 무엇이라도 시작해보자! 하고 맘을 먹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게임 개발 동아리이다. 그 중에서도 교내가 아닌 연합 동아리를 선택한 이유는... 제일 처음으로 공고가 보인 동아리가 연합동아리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워낙에 장수한 동아리이고 큰 규모인지라 교내 동아리보다 여러가지 얻어갈 정보들이 많아보였다. 사실 그렇게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모집 기간이 그 다음 날 마감이라는데 다음 모집은 한 학기 뒤에나 있다보니 일단 이것부터 찔러나 보자! 하고 준비했던 게 어찌저찌 성공한 거다. 동아리에서 모집하는 직군은 크게 기획, 프로그래밍, 아트, 사운드가 있었고, 프로그래밍과 사운드는 해본 적이 없다보니 기획과 아트, 두 파트 중에서 고민을 했다.
사실 이때부터 나의 마음은 내가 기획자가 될 것이란 걸 가리키고 있었지만, 당장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는 아트 쪽 포트폴리오 밖에 없었다. 기획 쪽은 포트폴리오로 무엇을 내야하는지조차 몰랐다. 그 당시의 나는 이런저런 글을 작성한 적은 있어도 게임을 기획해본 경험도 없었을 뿐더러, 게임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당연하지, 20살이 넘어서 늦게 배운 도둑질처럼 맛 들린 게임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들로, 처음엔 내가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분야로 게임 제작을 배워보다는 마음으로, 무엇보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다는 마음을 담아 동아리에 아트 직군으로 가입했다.
놀랍게도 환대를 받으며 들어왔다. 완벽주의로 만들어낸 포트폴리오에서 큰 가산점을 받았다.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들어온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내가 가진 재능으로 좋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특성도 결국엔 어딘가에서 빛을 발한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2. 2D 게임 아티스트를 꿈꾸다
인생을 바꾼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이 동아리는 정말 큰 도움이 됐으니까.
게임 분야를 새롭게 배워가며 부족한 점들을 많이 알아나갔다. 그 때의 나는 아직 내가 기획자를 꿈꿀지, 아티스트를 꿈꿀지 정확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런만큼 그동안 글에 비해 살린 적이 적었던 아트 쪽 재능을 한번 원 없이 펼쳐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나의 동아리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내가 잘하는 2D 아트 쪽으로 캐릭터도 그리고, 아이템도 그리고, UI 리소스도 그리면서 게임 제작이 무척이나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재밌던 것은 기획의 설명을 듣고 그에 걸맞는 캐릭터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당시 비주얼 노벨 형식의 게임을 만들던만큼 캐릭터의 분위기가 꽤나 중요했는데, 내게 많은 자유도를 넘겨준 기획 직군의 설명을 듣고 하나의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이 캐릭터가 게임에서 살아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신선했다.
캐릭터 디자인이 하고 싶어서 아트 직군으로 아예 정착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나는 비전공자였고, 다룰 수 있는 툴도 별로 없을 뿐더러 범용성 넓은 그림체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기본기가 부족했다. 나의 그림체, 나의 분야에서는 최정점을 찍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내가 내 게임을 만들 때의 이야기다. 협업이 기본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대형 게임사에서는 난 무용지물이었다.
실제로 동아리에서 좋은 기회로 아트 쪽 현업자 분을 만나뵈었을 때, 그 분은 내 적성과 관심사를 들으시더니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ㅇㅇ님은 인디게임 회사를 차리셔야겠네요..." 라고 좋게 이야기해주셨다. 하지만 난 그 안의 뼈를 잘 느끼고 알아들었다. 좋은 말로 할 수 있다고 헛된 희망과 꿈을 심어주시기보다는 나의 적성을 파악하고 좋은 말로 날 포기시켜주신(?) 그 분에게 감사하기까지 하다.
난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겪으며 기본기를 다시 쌓거나,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거나, 의 길에 놓였다. 난 후자를 선택했다. 머리가 깨지는 고통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동안 3D 툴도 배워보려 했고, 기본기를 위해 하루에 한 번씩 크로키를 해보며 6개월을 살아보기도 했고, 학교에선 TA쪽 복수전공을 선택해 아트와 프로그래밍을 건드려보기도 했다. 실력은 더디게 늘었고, 고행의 과정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쌓지 않았던만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일을 주변에선 너무나도 쉽게 하고, 재밌어하는 걸 보았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과 성과를 비교했을 때 난 이 길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떻게든 뚫어내서 할 수야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시간도, 돈도 너무 많이 드는 일이기도 했다.
다행인 건 내겐 다른 길도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1년 간 2D아트로 배워가며 쌓아온 아트 실력과 그 작업물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경험이 내겐 또다른 기반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게임 기획자로서의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2. 게임 시나리오 기획자를 꿈꾸다
난 내가 게임을 잘 모르는 것이 아쉽다.
그래서 난 여전히 주변 게임 업계 지망생들에게 종종 농담 삼아 내가 "게임 조기교육"을 못 받은 것이 정말 아깝다고 이야기한다. 20년 동안 롤 한번 안해보고, 크아도 한두 판, 그나마 슈 게임이나 조금 하고, 아마니타 디자인 사의 머시나리움을 통해 게임의 신세계를 맛본 정도가 나의 게임 경력이다. 게임은 "권장하지 않는" 집에서 자랐으니까. 그렇게 게임 경력이라곤 초라하다보니 게임에 대한 인사이트가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임을 사랑하고, 새로운 재미에 대해 무엇이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주변 게임 기획자 지망생들에 비해 배울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이 역시도 기본기가 부족했달까.
물론 그 "조기교육" 대신 나는 다른 자산들을 얻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진심으로 아까운 것은 아니다. 난 그 대신 뛰어난 문장력과 분석력, 미적 감각과 툴 활용 능력과 자기 절제력 등을 얻었으니까. 그냥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한다. 20살 넘어서 문장력이나 자기 절제력을 기르는 것보다는 게임을 하는 편이 그래도 쉽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며 할 수 있다고 내 자신의 열의를 키워나갔다.
그럼에도 게임에 대한 인사이트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여전히 기획자로써 콤플렉스라면 콤플렉스다. 그래도 그동안 나는 이를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걸음마를 떼고, 달려나가는 중이다. 게임을 온전히 사랑하고 즐기는 법을 배우는 건 물론이고, 많은 사람과의 게임 플레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본격적으로 게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게임 기획도 최대한 많이 배우려 노력했다. 여러 게임 기획 관련 서적, 강연, 주변 지망생들 등을 통해 열심히 배워나갔다.
배울 수 있는 수단으로는 학원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가려면 충분히 갈 수야 있었지만, 직접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이 수업으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재밌기도 했고, 학교와 게임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마당에 학원을 다니는 게 쉽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 나는 내가 학원 식의 압박을 못 견뎌할 걸 알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그토록 치열하게 경쟁하는 강남 8학군에 살면서 학원을 전혀 안 다니고 공부해서 나름 좋은 대학을 갔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거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학원 커리큘럼을 봤을 때에도 우선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다보니 바로 그 쪽에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배워보고 여전히 학원이 필요한지 판단해보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학원을 제외한 여러 곳에서의 도움을 받으며 콘텐츠나 시스템 기획도 어느 정도 건드려보았다. 밸런싱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이론적인 것만 대충 이해하는 정도로 그쳤지만, 그래도 내 게임 제작 관련 시야를 최대한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험한 길을 먼저 걸어가신 게임 기획 현업자 분들은 NDC로, 서적으로, 블로그로 그 길의 억센 풀을 밟아두셨다. 그 길을 따라가며 때로는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헤쳐나가는 중이다. 늦더라도 차근차근, 모든 걸음이 의미 있는 걸음이 되도록 신중히. 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 1년에서 1년 반의 시간 동안 배운 것 치고는 분명 많고 깊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내 시야를 넓히다보니 시나리오 기획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에겐 게임 시나리오 기획이 적성에 맞는다는 걸 그 과정을 통해 여실히 깨닫게 되었으니까. 다른 분야에서 눈을 반짝이며 열변을 토하는 기획 지망생들을 볼 때 멋지다고 느꼈다. 나도 그 분야의 기획을 재미있어하긴 하지만 저 정도까진 아직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시나리오 기획과 관련해 이야기를 할 때엔 나도 똑같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이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쩔 수 없다. 난 회사 미팅에서도 어느 캐릭터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그걸 유저들이 좋아할지 아닐지를 분석하는 걸 너무나도 재밌어하는 사람이니까.
마치며
사실 이렇게 맘을 굳힌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와 긴 여정을 통해 나는 내 강점과 단점을 명확히 알고, 오히려 시행착오에서 잘못 찍은 걸로도 보일 수 있는 "잡 수치"들이 꽤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활용할 방법만 찾는다면 무엇이든 좋은 경험이 된다고 생각한다. 할 거면 지금 하지, 언제 또 이런 걸 하겠어 하는 맘.
결국엔 나의 모든 노력, 모든 행동이 큰 의미가 있는 한 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다소 빠르게 글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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