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덕질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

[게임] 발더스게이트3: 시나리오의 XXXXX은 누구일까

련잉엥용 2024. 8. 4. 19:43

스포일러 주의.

내 인생 처음 보는 플레이 타임

발더스게이트3의 어두운 충동 버전 개인플 엔딩을 봤다.

모든 여정을 끝마치며 느낀 점은... 이런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개발사에서 얼마나 많은 회의와 검토, 수정과 퇴고가 필요했을지 감탄만 나온다는 것.

게임 시나리오 계에서는 거의 차력쇼 수준의 방대한 양과 정교함을 갖추었는데, 이런 시나리오를 갖출 수 있게 한 디렉터가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간단한 후기를 작성해본다.

 

새벽 7시까지 게임 플레이를 마치고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나는 거의 2-30분 간을 더 소요해서 이 게임의 제작진을 꼼꼼히 살펴봤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시나리오 쪽 담당자가 몇이나 되느냐 하는 것. 대략 3~40명의 스크립팅 파트와 2~30명의 라이팅 파트로 나뉜 시나리오 사람들을 합치면 이 게임의 스토리를 위해 5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필요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충혈된 눈으로 "와"하는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만큼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디렉터의 중요성을 크게 느낀 것 같다. 그 방대한 시나리오의 양을 어떻게 썼느냐 하는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 이해할 수 있다. 50명이나 되는 사람들(로도 물론 부족했을 것 같지만) 어쨌든 잘 써내어 이와 같이 훌륭하게 마무리짓긴 했으니.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모든 개발진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간 지도자의 역할이다. 자연히 라리안 스튜디오의 개발 과정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물론 중간에 나가거나 합류한 사람, 보조직만 맡은 사람 등 이런저런 변수야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알기론 국내 게임사에서 시나리오쪽 파트에 50명이나 할애하는 게임 개발 팀은 없다. 엄청난 대형 게임이 아니라면 10명을 넘는 팀도 적을 것이다. 그나마 퀘스트 쪽 기획자와 합쳐 본다면 20명 정도 되는 팀이 아주 가끔 있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어느 한 파트만 보아도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기획자 수이다.

 

다른 파트보다도 특히 시나리오 파트는 특히나 방향성을 통일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주요 세계관을 알아야 하고, 주요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동일해야 하며, 문체 또한 맞아야 한다. 더군다나 각자의 파트에 맞는 시스템도 숙지해야 한다. 물론 어느 파트가 안 그렇냐마는, 시나리오는 특히나 전체에 대한 시야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 시야각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만 한다.

그런데다 발더스게이트3은 멀티 엔딩 게임이다. 멀티 엔딩만 있다면 그만이지, 수많은 선택지에 대해 수많은 결과가 나오는... 멀티버스형 게임이다. 많은 이야기의 갈래 중 어느 한 분기에 지나치게 많은 비중이 치중되면 안되고, 내용이 반복되어서도 안된다. 나는 어두운 충동이 되기도 하고, 타브가 되기도 하고, 아스타리온이 되기도 하고, 섀도하트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관점에 대해 각기 다른 설정 오류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에 대해 어느 하나라도 전체 세계관이나 스토리에 맞지 않는다면 해당 부분의 리소스를 버려야 한다거나, 방향성 수정을 위해 아예 스토리의 주요 분기 중 하나를 도려내야 한다거나 하는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경험담이라 말하지만, 이건 정말 뼈 아픈 일이고, 자식을 잃는 기분과도 같다.

말하자면 시나리오 파트는 거의 엘더브레인과 같이 거대한 뇌에 종속된 사람들처럼 협업해야만 이와 같은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었을 거란 말이다. 나는 그 엘더브레인의 역할이 되었을 디렉터를 존경한다.

별개로 으악 징그러워!!!를 연발한 장면. 울다시피 플레이했다.

 

더군다나 시나리오 갈래가 나뉘고 합쳐지고 하는 과정 때문에 섣불리 이것을 쪼개어 어느 팀은 무슨 파트를, 어느 팀은 무슨 파트를 맡는지 등의 작업 분배도 어려웠을 것 같다. 각 퀘스트 내용끼리도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에 시나리오 내부에서도 많은 논의와 회의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각 퀘스트가 별개의 과정으로 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존 RPG 게임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진짜 어떻게 한 거지.

그래서 더더욱 발더스게이트3를 시나리오 차력쇼라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스토리의 내용은 엄청난 충격을 준다거나, 대단한 반전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없다. 결국 오픈월드식 스토리라고 말해봤자 몇 가지 엔딩으로 귀결될 뿐인 반픈월드식 스토리다...라는 평이 있기도 하고, 물론 설정 오류가 없지도 않다. 적당히 흠결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스토리가 마치 한 명이 써내려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신기하다.

방대한 양과 정교한 세계관을 뽐내는 정통 판타지 작가들을 보면 이따금 열혈 팬의 지적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느낌으로 협업이 진행된 걸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이 세계관이 DnD에서 유래되었단 생각을 해보면 어쩌면 그런 열혈 팬이 모여 만들어진 팀은 아닐까, 또다시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본다. 어쨌든 결론은 웬만한 위대한 작가 한명처럼 활동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라이팅 팀 메인 디렉터로 보이는 Adam Smith님의 X 소개글. 라리안 스튜디오의 보이지 않는 손... 아마도 엘더브레인...
섀도하 트와 할신을 맡은 라이터 John Corcoran님의 링크드인 내 작업 소개글. 당연하긴 하지만 캐릭터별 스토리 담당자가 다름을 엿볼 수 있다.
스크립팅 파트 디렉터 중 Jan Smejkal님의 링크드인 소개글. 어떤 식으로 체계가 이뤄졌는지 엿볼 수 있다.

확실히 위의 링크드인을 보면 디렉터의 업무가 장난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꽤 재밌는 건 대부분의 리드급 인물들 링크드인 사이트를 염탐하다보니 안 사실인데, 대부분 시나리오 외길 커리어는 아니라는 점. TA쪽 직무를 하는 사람도 있고, 위의 사진처럼 게임 시스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번역 일을 하다 온 사람도 있고, 사진 일을 하던 사람도 있고, 마케팅 일을 하던 사람도 있고, 역사학 전공인 사람도 있다. 멀티링규얼인 분들도 많다.

물론 정통으로 내러티브 계열 전공을 하고, 게임 시나리오 일을 하며 BAFTA나 Nebula 수상을 한 라이터 분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렇게 많은 전공의 인물이 모여 각기 다른 분야에서 힘을 쏟으니 지금의 발더스게이트3이 탄생할 수 있었겠지. 나도 지금 나의 강점을 살리는 것에 집중해서 남의 것을 부러워하기보다는 내가 재미있고 내가 잘하는 것을 크게 키워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발3은 지금 멀티플로 4명이서 진행 중인 버전이 두어 개 더 있긴 한데 이건 엔딩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버전에서는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분명 이전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감상을 느낄 것이다.

아무래도 인생 게임으로 자리하게 될 것 같다. 지금까지 그 반열에 오른 게 젤다 야숨밖에 없었는데 요새 들어 발3과 리버스:1999가 추가되었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은 아무래도 게임 시나리오 외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동시에, 그 안에서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향성이 subtle하기에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 좋았다. 또 리버스:1999는 연출이나 소재를 사용하는 방식이 무척 세련되고, 그 안에서 캐릭터를 강조하는 방식도 무척 익숙하면서도 새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러나 발더스게이트3은 그냥 게임 시나리오로 한계를 돌파한 느낌이다. 시나리오 계의 오픈월드의 가능성을 제시했달까.

어쩌면 AI가 더 발전했을 때 그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전에 언급했듯 아직까지 발3은 반픈월드식 시나리오에 가깝다. 어쨌든 패키지 게임이기에 완결을 지어야 하니까. 하지만 AI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유저의 각 선택에 맞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이에 맞는 리소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훨씬 적은 인력으로 엘더브레인식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뻘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요즘 AI의 발전 속도를 본다면 마냥 불가능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나리오 안에서 AI를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을까. 나부터가 AI를 더 많이 공부하고, 기술의 선두주자가 되어야만 그 트렌드에 편승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게임 엔진도, 프로그래밍의 자료구조도, 세련된 연출도, 정교한 시나리오 구성도, 나의 소스가 되는 인문학도, 그리고 지금의 AI도... 이 모든 것에 손을 대다보면 또 이런 분야가 몇십 개씩 열릴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 맞다. 지식을 늘려가다보면 자연히 내 무지의 영역에 걸친 경계가 점점 늘어만 간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 또한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