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덕질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

[캐릭터] 서브컬쳐 게임 내 조력자 캐릭터를 알아보자: <원신>+<명조>+<리버스: 1999> 위주

련잉엥용 2024. 7. 11. 00:27

0. 들어가며

 

게임에서 처음 만나는 캐릭터가 그렇게 중요할까?

서브컬쳐 게임에서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캐릭터, 혹은 캐릭터 무리는 유저가 게임에서 느끼는 감정을 결정하기 때문에 코어 팬층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게임 내에서 자주 활용되는 편이며, 심지어는 게임의 간판 캐릭터 격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캐릭터들은 게임의 초반부에서 유저를 이끌며 세계관을 안내하고, 앞으로의 할 일을 알려주며 유저를 응원하는 역할을 필연적으로 맡게 되기 때문에 시나리오 기획자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경우도 많다. 유저가 쉽게 게임의 스토리를 수용하도록 하는 첫 인상이기 때문에 치밀한 설계가 필요하다.

실제로 내가 플레이한 세 개의 게임, 원신, 명조, 그리고 리버스:1999 모두 게임에서의 첫번째(혹은 두번째)로 만나는 캐릭터를 앱 썸네일로 활용한다.

차례로 페이몬, 양양, 소네트.

 

이런 특성 때문에 게임 내 조력자 캐릭터는 필연적으로 공통된 특징을 몇 가지 가지곤 한다. 오늘은 내가 그나마 오래간 플레이해본 세 개의 서브컬쳐 게임에 나온 조력자 캐릭터, 페이몬&앰버(원신) / 양양&치샤(명조) / 레굴루스&소네트(리버스:1999). 이들을 통해 캐릭터 도식을 정형화해보려 한다.

먼저 일러두는 것.
방랑자, 여행자, 타임키퍼 등 서브컬쳐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지칭하는 말은 각기 다르다. 이를 통칭해서 주인공으로 부르기로 한다.
조력자라 함은 주인공이 메인 스토리에서 처음 만나 초반부에서 일정 부분 함께 일행으로서 행동하게 되는 캐릭터 무리를 통칭한다. 그 예시는 위와 같다.

 


 

1. 개요: 대부분의 경우 스피드웨건을 탄 광대가 주인공을 주워간다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캐릭터의 성격 상 세계관을 가볍고 재밌게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이다. 그래야만 유저가 게임 세계관에 쉽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

<명조>는 그런 캐릭터 도식을 아주 정석대로 활용한 사례다. 양양이 스피드웨건이고, 치샤가 광대이다. 양양은 열심히 주인공을 돕고, 그의 상태를 체크하며, 세계관에서 주인공이 모를만한 부분을 설명해준다. 지나칠 정도로 많이 설명을 해준다. 반면, 치샤는 옆에서 실 없는 소리를 하며 그 분위기를 완화한다.

그러나 실없는 소리래봤자 이 정도...

안타까운 점은... 명조의 조력자 캐릭터는 너무나도 정석대로 활용한 케이스라 그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인다는 것. 지나치게 정형화된 롤 때문에 두 캐릭터를 어떻게 쓰려고 했는지 알면서도 속아넘어가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그 비중이 양양에게 80% 이상 쏠려있는만큼 밸런스가 무너져 무겁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을 만든다. 이 때문에 몰입이 자주 깨진다. 특히 구린 로컬라이징 탓에 그 양상이 곱절이 된다. 대사에 개그 맛이 전혀 안 산다. 재밌으라고 한 말 같은데 재미 없다. 이런 탓에 명조의 첫 스토리는 혹평을 듣게 되었다.

 

한편 <리버스:1999>는 그 조력자 캐릭터를 매우 독특하게 사용한다. 명확히 역할은 소네트가 스피드웨건이고, 레굴루스가 광대인 것으로 분배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 둘이 주인공을 보조하기보다는 소네트와 함께 레굴루스를 잡으러 다니는 전개로 시작한다.

보통 서브컬쳐 게임에서의 주인공은 최대한 그 존재감을 지운다. 남/여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게 하거나, 누가 봐도 "디폴트값"스러운 캐릭터를 내세우곤 한다. 또 이세계에서 왔다거나, 과거를 잊었다거나 하는 설정을 추가해 플레이어와 세계관 지식의 정도를 함께 하려는 노력의 일환도 엿보인다. 이처럼 플레이어가 직접 세계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자유도를 해치지 않기 위해 보통 게임의 주인공은 성우를 활용해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많이 없고, 최대한 성격을 모호하고 무뚝뚝하며 중립선/질서중립 성향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리버스:1999는 주인공이 버틴(타임키퍼)으로 고정되어 있어 외관과 성격, 스토리가 명확히 지정되어 있고, 플레이어가 이를 조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브컬쳐 게임 중에서는 특수성을 가진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버틴이다. 그래서 이런 전개를 위해 버틴이 나서 역행비에서 레굴루스를 구하는 전개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때문에 난해하고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이것이 플레이어의 취향의 범주 안이라면 꽤나 효과적이고 유용한 전개가 될 수 있다. 주인공의 성격이 정해져 살아 움직이는만큼 시나리오의 자유도가 훨씬 높으니까.

안... 수상하다.

 

<원신>은 조력자 캐릭터를 제일 신기하게 활용했다. 위에서는 조력자로 페이몬과 앰버를 꼽았지만, 사실상 페이몬이 스피드웨건과 광대를 모두 맡는다. 앰버는 몬드성에 한정한 스피드웨건이랄까. 더군다나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제시하는 명조나 리버스와는 달리 페이몬은 명확히 게임의 마스코트 격 캐릭터이다. 페이몬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마스코트야.

리버스:1999는 마스코트가 딱히 없고, (있다면 애플 씨가 아닐까) 명조는 나중에야 마스코트 포포를 등장시켰다. 원신처럼 처음부터 인간형 마스코트를 조력자로 활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군다나 여행 내내 따라다니며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더더욱.

페이몬의 매력은 뻔뻔한 사차원이며, 주인공과 세계의 이해에 대한 결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주인공의 편이라는 인상에서 더 배가된다. 이전 명조 분석에서도 설명하듯, 나와 같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페이몬이 곁에 있으며, 내가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가지더라도 주인공의 입으로 쉽게 내뱉지 못하는 질문들을 페이몬이 대신 해준다.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세계관을 풀어내기 매우 적합한 수단이 된다. 즉, 페이몬은 게임 속 이야기를 유연하게 풀어나가고, 게임이 스스로 "츳코미"를 걸며 융통성 있게 질문을 풀어나갈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런 탓에 원신의 메인 스토리는 그 시작이 느릴지는 몰라도, 플레이어가 이에 몰입하여 받아들이기가 한결 쉬웠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매끄럽다.

다만 시나리오 기획자의 입장에선 확실히 페이몬이 제일 만들기 어려운 캐릭터로 느껴진다. 페이몬에게 이렇게 큰 역할을 쥐어주어야 할 당위성을 디렉터에게 설득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소네트나 양양 같은 캐릭터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므로 실장이 되어있기 때문에 매출에 도움이 되겠지만, 페이몬은 실장도 안되기에 매출을 올릴 수도 없을 뿐더러, 결국 그 존재가 모호하므로 시나리오 중 설명해야 하는 또다른 존재로 남게 된다. 잘못하면 명조만도 못한(명조 미안) 이해 불가 스토리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신의 페이몬은 대단히 신기한 캐릭터이다. 아마 이 쪽을 분석하는 걸로 한 편을 써도 충분하지 않을까... 지금 당장 주루룩 분석하기엔 너무 많은 분량이 될 것 같다. 나중에 원신 스토리에서 페이몬을 더 자세히 알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 스피드웨건: 일편단심 질서선 성향 주인공바라기

 

내가 접한 스피드웨건형 캐릭터는 웬만해서 저런 도식을 따른다.

주인공바라기 만큼은 필수 조건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서브컬쳐 게임에서 스피드웨건형 조력자는 주인공과 결코 싸우거나 반항하는 일이 없다. 없어야만 게임이 진행되니까. 또, 게임의 시스템을 설명할 때에 직접 예시가 되곤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원신과 같은 특수 케이스가 아니고서는) 사용하는 스킬 자체도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아마 이런 탓에 더더욱 스피드웨건형 캐릭터는 게임의 대표가 되기 적합할 것이다.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을 가장 잘 드러내니까. 이 외에도 언제나 주인공과 함께해야하는만큼 주인공과 밀접한 직위에 있거나, 주인공을 아끼고 케어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세계관 상 주인공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존재이다. 물론 이 또한 예외는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가까운 역할을 해야하는만큼, 주인공보다는 약하지만 그를 누구보다 응원하고, 누구보다 지지하는 존재. 당장 양양과 소네트만 봐도 성격적으로 비슷한 면모가 많다. 서브컬쳐가 아니지만 던파의 세리아, 마비노기의 나오도 그럴 것이다. 이런 성향에 맞는 성격을 고려하다보면 대부분 청순 속성 여캐가 그 포지션을 맡는다.

예뿌다...

모두 호기롭고 선하며 믿음직스럽다. 이들 또한 각각 코어 팬층이 존재하곤 한다. "질서선+언제까지고내편!" 도식의 캐릭터는 고정 수요가 꽤 있으므로. 이런 캐릭터는 메인 스토리의 후반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도 좋은만큼, 처음부터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의 세계관마다 특수성은 다르겠지만.

 


 

3. 광대: 생각보다 만들어내기 어려운 캐릭터

 

광대 롤은 재밌어야 한다.

당연한 거지만 그게 정말 어렵다. 개인적으로 시나리오 기획을 해보며 이 쪽이 제일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재밌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 기획자도 위트가 있어야 하며, 연출이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아야 하며, 로컬라이징도 준수해야 한다. 개그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유저는 이미 이 게임을 처음 접해보며 시험대에 올린 상태다. 자신과 맞을지 아닐지 끊임 없이 의심스런 눈으로 게임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유저를 단숨에 무장해제시킬 만큼의 뻔뻔함, 그만큼의 강단, 그만큼의 매력을 제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연스러워야 하며, 지나쳐서도 안되고, 비중이 작아서도 안된다. 정도를 잘 아는 것, 그것이 광대 캐릭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다.

 

다시 명조 이야기를 꺼내보자. 치샤는 실패한 광대 캐릭터이다. 임팩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개그를 위해 끼어든 캐릭터라는 것이 눈에 보이고,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성급이 높지 않은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길 필요가 아주 크지는 않았겠지만, 중요한 건 이게 유저가 처음 만나는 캐릭터라는 것. 치샤에 매력을 못 느끼면 게임에 매력을 못 느낀다.

양양과 치샤의 역할을 너무 지나치게 나누어 구분해둔 탓에 양양의 설명 폭탄으로 경직된 게임의 분위기를 치샤가 부드럽게 풀지 못한다. 실 없는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무마시키기엔 양양이 너무 심각해보인다... 더군다나 이미 치샤도 이 세계에 적응한 이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보다~"하는 느낌으로 세계를 납득해버리므로 개그가 공감이 가는 것도 아니다. 결론은 의미 없는 개그 캐라는 말.

 

한편 원신과 리버스에서 각각 사용한 페이몬과 레굴루스는 유저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다. 뻔뻔하고 사차원인 이들은 세상에 대한 의문을 쉽게 고발하고, 그만큼 쉽게 납득시킨다. 또 게임의 대표 밈(ex: "어머니가 계셨구나!")으로 자리잡는만큼 게임을 명확하게 기억하게 만든다.

이걸로 광고하다니 진짜 신... 신기하다

밈은 생각보다 중요한 지표다. 명조의 대표 밈이 망고스틴이 된 것을 생각했을 때, "어머니가 계셨구나!"라는 터무니없지만 강렬한 한 마디가 "망고스틴 그게 뭔데"보다 긍정적인 인상을 제공할 것이라는 건 확연한 사실이다. 전자는 웃음이 나고, 후자는 헛웃음이 난다. 망고스틴은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그 스토리의 구림(...)에 대해 곱씹게 되는 반면, 레굴루스의 대사는 레굴루스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어떠한 밈이 남느냐 또한 유저의 첫 인상과 리텐션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결국 광대보다 스피드웨건 캐릭터의 형성이 중요하다. 게임의 분위기에 따라 광대 롤은 생략이 가능하다. 정통 판타지, 혹은 심각한 이야기의 시작을 그릴 때 광대 롤 캐릭터를 섣불리 사용하기보다는 스피드웨건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반은 간다. 특히 후술할 바와 같이 광대 롤을 만드는 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정석대로만 해도 반은 간다...의 느낌.

 


 

4. 결론: 첫 인상은 신중하게

페이몬이라는 예외적인 케이스를 제외하고 스피드웨건과 광대를 나누는 이유 또한 페이몬과 같은 운용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페이몬을 따라한다고 페이몬 같은 캐릭터가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닐 뿐더러, 자칫 표절 의혹으로 이어질수도 있는만큼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도 사실이고.

또 페이몬이 반드시 정답인 것도 아니다. 원신에는 잘 어울렸을지 몰라도 게임 장르나 세계관, 추구하는 시나리오의 방향이 원신과 단 0.5도 틀어져도 페이몬이 오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오답 풀이가 아닐까. 최소한 명조처럼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방향성이 잡히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명조 미안)

스피드웨건과 광대 롤의 캐릭터를 각각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없다면 어느 하나는 포기하는 게 맞다. 대부분의 경우 그게 광대여야만 하고. 차라리 설명이라도 제대로 하면 앞으로 있을 스토리에서 지루한 포인트를 만회할 수 있다. 대부분 유저는 "튜토리얼은 지루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점에 조금 더 관대하므로.

잘 할 자신이 없다면 욕심을 버리고 기본이라도 하자. 내가 배운 핵심은 그것이다.